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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사유/연극이론

<빈 공간> 피터 브룩 저 요약_반복과 재현 그리고 관객이 만드는 현장의 예술, 연극

by Ignacio2023 2023. 11. 12.

 

피터 브룩 <빈 공간>

 

 

현대 연출을 대표하는 연출가를 꼽자면 단연 피터 브룩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저서 책 <빈 공간>은 연출가뿐만 아니라 배우들에게도 큰 인사이트를 줄 수 있는 책이다. 그는 줄곧 ‘관객’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책을 펼치면 가장 처음 접하게 되는 문장에서도 그는 ‘지켜보는 사람’즉, 관객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빈 무대가 될 수 있다. 누군가 이 빈 공간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다른 누군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연극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죽은 연극’ ‘성스러운 연극’ ‘거친 연극’ ‘살아 있는 연극’, 이 네 갈래로 현대 연극의 경항과 방향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첫째로 ‘죽은 연극’은 공연의 형식과 내용이 너무나 정형되고 짜여져서 그대로 되풀이되는 연극이 대게 그렇다고 이야기하며 그렇게 짜여 고정된 순간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연극의 어떠한 것들이 죽기 시작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이런 죽은 연극을 만들어내는 요소는 ‘돈’즉 자본시장의 논리가 그러한 연극을 만들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그러한 죽은 연극을 관람하는 죽은 관객들이 생겨나서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감동적이지도 않고 재미조차 없는 연극을 어떤 수를 써서라도 즐기려고 애쓴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러한 관객들의 태도에 대한 지적은 브레히트가 중요시하게 여겼던 ‘관극술’의 중요성에 힘을 보탠다. 관객들 또한 연극을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 생산자로서 관극을 하는 방법에 대한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러한 죽은 연극을 만드는 가장 강력한 주체는 죽은 연출가이다. 그들은 연극에 종사하는 모든 구성원에게 베어 있는 조건반사적 타성에 일격을 가하지 못하는 연출가이다. 조건 반사적인 타성이란 위에어 언급한 자본 또는 연출가의 창작 의지가 관객들의 요구에 의해 주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대게 자본과 타협은 연출가 관객들이 좋아할 이야기를 창작한다. 그것이 곧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만들어 낸 연극이 ‘죽은 연극’이기 때문에 연극계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이러한 죽은 연극과 대조하여 ‘성스러운 연극’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연극’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변증법적 사고를 유발’할 수 있는 연극이다. 연극은 아직까지도 유일하게 이상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포기하지 않은 최후의 공론회장이라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TV드라마, 영화 등 미디어와 매체가 쏟아지고 있지만 진정한 이상적 사고의 유발하는 작품은 몇몇의 독립영화나 웰메이드 영화를 제외하고는 드물다. 그리고 그것들은 관객들의 가슴속에서, 삶에서 금방 잊혀지기 마련이다. 피터 브룩은 이러한 성스러운 연극을 시도하거나 이룬 대표적인 예술가들로 베르톨트 브레히트, 앙투안 아르토, 사뮈엘 베케트 등을 꼽는다. 이들의 연극 작업은 ‘도취되고 감염되며, 유추를 통해 주술에 의해서 역병처럼 작동하는 연극, 텍스트의 자리에 공연 현장의 무대가 있는 연극’즉, ‘새로운 제의’의 연극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베케트의 부조리극은 비현실적 요소를 탐구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우리가 일상에서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진실이 부재하며 오히려 당치 않아 보이는 현상 속에 진실이 존재한다는 명제를 입증하고자했다.

 

성스러운 연극은 ‘해프닝’을 통해서 만들어질 수 있다. 환경이 변하면 누군가는 이 순간을 포착하고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이 행위를 하는지 되새기지 않는 한 이 느낌 또한 사그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문제는 아무 목적도 없이, 다음은 어떻게 가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우선 총알부터 발사하고 보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사실이다. 공연자는 관객하고 눈만 마주쳐도 도발해봐야겠다는 욕구가 발동한다. 일단 쏘고, 질문은 나중에 되는대로 해보자고, 이것이 해프닝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해프닝은 관객들로 하여금 ‘깨어나라’는 외침이다. 관객들은 앞서 말한 변증법적 사고를 통해 무대 위의 행위를 통해서 삶의 변화를 모색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프닝 처음에는 관객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지만 관객은 점점 덤덤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다시 ‘죽은 연극’이 되기 십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출가는 계속해서 변하는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공연의 유통기한은 5년이다”고 평가하는 피터 브룩의 말을 백번 공감한다. 10년 이상 공연되고 있는 오픈런 공연들을 보자면 웰메이드 작품임을 인정하면서도 이제는 촌스럽고 볼품없어진 ‘한 때’ 잘나갔던 스타를 보는 느낌이다. 연극은 끝없이 새롭게 탄생해야 한다. 기존에 있는 작품들이 새롭게 탄생하기 위해서는 애써 감동을 느끼려는‘죽은 관객’이 아닌 ‘깨어 있는 관객’들의 냉정한 평가가 내려지고 제작사와 연출가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관객들을 깨우쳤던 연극은 형식을 가리지 않는 ‘민중극’이었다. 그리고 그 요소는 거칢(roughness)였다.

 

 

 

 

거친 연극은 고유한 스타일이 정해져있지 않은 민중 친화적인 연극으로, 인형극이나 그리스의 그림자극 등이 포함된다. 또 이 거친 연극은 ‘성스러운 연극’이 되는 수단으로 공통적으로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는 열망, 끝날 줄 모르는 위선과 맞서 싸우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예술가들이 낯설게하기, 초현실주의, 심리주의, 초현실주의, 해프닝, 가난한 연극과 같은 형태로 발전시켜 나갔고 이러한 도전과 실험은 연극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독일의 작가 겸 연출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현대 연극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가 만든 ‘낯설게하기’는 현대 연출가들이 새롭게 변주해야 할 주된 선율이 되었다. 그는 사람은 누구나 연극 안에서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다는 낭만적 사고를 거부했다. 이러한 ‘새 형식’에 대한 도전은 간혹 주제 의식의 전달에 대한 오류를 낳기도 하는데, 그래서 현대 연출가들은 주제 의식을 오해의 여지 없이 선명하고 과감하게 연극에 투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피터 브룩은 ‘오늘날에는 거친 요소가 다른 어느 시기보다 활개를 치고 있으며 성스러운 요소는 다른 어느 시기보다 죽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TV드라마와 영화와 게임, 심지어 뮤지컬과 같은 한때 연극의 형제였지만 지금은 너무 멀어진 공연예술 역시 거친 수단을 통해 감상자들에게 충격을 주지만 그들을 진정 깨어나게 하는지는 의문이다. 작품이 전하는 스토리와 그것을 전하는 언어는 그들을 깨어나라고 하고 있지만 받아들이는 감상자들은 아직 깨어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을 소비하는 이유가 깨어나는 것과 반대로 9시부터 6시까지 노동을 위해 깨어있었던 스스로에게 ‘환상’을 제공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욱 그들이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극장에 찾아가야 하는 이유 즉 연극 예술의 신뢰 회복은 연극인들에게 달렸다. 그러면서 피터 브룩이 하는 이야기는 이만희의 희곡 <처녀비행>속 마지막 장면에서 무대 위에서 헐벗는 배우들을 연상시킨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속임수 따위는 쓰지 않으며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음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열 손가락 펼쳐 빈손임을 보여주고 소매 속에 정말로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음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만이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길이다.”

 

이렇게 신뢰를 회복한 연극은 관객들에게 살아 있는 경험 즉, ‘살아 있는 연극’을 선보여야 한다. 살아 있는 연극은 곧 ‘재현’의 연극으로 단순한 ‘모방’을 넘어서서 일상적인 의식의 흐름보다 더 사실처럼 느껴지게 만들고 관객들을 동요시킨다. 이러한 현재성은 관객들에게 과거의 이미지를 복사하여 보여주는 것이 아니며 과거의 경험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잘 짜여진 무엇인가가 지금 현재 무대 위에서 살아 있기 때문이다. 성스럽고 거친 연극은 곧 살아 있는 연극이 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정해진 틀에 갇혀 죽은 연극을 만드는 오류에서 벗어나 배우들에게 즉흥연기 훈련 등 다양한 연기 훈련을 시켜야 한다. 간혹 폭군이 되고 싶지 않은 연출가들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데 이것은 연출가의 직무유기라고도 볼 수 있다. 배우들 또한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언제라도 몽땅 파괴하고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간혹 자신만의 생각과 고집에 빠져서 연출가의 피드백을 잘 수용하지 못하는 배우를 마주할 때가 있다. 이러한 부류의 배우는 객관적으로 보아도 연기를 못 하는 배우보다 더 좋지 않은 배우라는 평가를 받을 확률이 높다.

 

 

 

 

첫 문단에서 언급했던 관객의 중요성은 책의 말미에 제대로 강조된다. 먼저 현대의 관객들은 그다지 연극에 열성적이지도 충성하지도 않는다고 평가하며 이러한 관객들을 대상으로 낡은 형식을 타파하고 새 형식을 찾겠다는 연극인들이 목적과 방향성을 상실하고 보이지 않는 과녁을 향해 제각각 화살을 날려대고 있다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새 형식을 쫓는 연극인들이 가져야 할 하나의 목적이 있다면 관객이 공연에서 느꼈던 감정과 공감했던 논점을 더 확실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희망을 품고 그들 마음속에서는 무언가 타오르게 되는 것, 그날의 경험이 그들의 기억 속에 하나의 형상, 하나의 ‘중심 이미지’로 새겨지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극인의 이러한 노력에 응당 관객은 호응해주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상황에 어떤 변화가 생기기를 원하는가?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무언가 달라지기를 바라는가? 자기 안에 그러한 변화의 열망이 없는 관객이라면 연극이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할 필요도, 사각지대에 돋보기를 들이댈 필요도, 탑조등이 될 필요도, 대결과 충돌의 공간이 될 필요도 없다고 말하며 변화를 요구하는 관객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하나의 공식을 제안한다. ‘연극 = R r a’라는 공식은 연극은 각각 repetition(반복/리허설), representation(상연/재현), assistance(관객/원조)로 이루어진 요소들의 곱(결합)이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된 네 가지의 연극에 빗대어 간단히 정리하면 ‘현재성’이 있는 살아 있는 연극은 곧, 잘 짜여진 삶의 재현이다. 이러한 삶의 재현은 무수한 반복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고 이런 노력은 작품을 질적으로 변화시킨다. 그렇게 재현된 무대는 관객의 원조를 통해서 진정 ‘성스러운 연극’, 즉 관객들을 깨어나게 만들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만들고,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연극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왜 책 제목이 ‘빈 공간’인지 추측해보건데, 빈 공간은 곧 무한한 가능성의 장이다. 비단 창작의 가능성 뿐만 아니라 삶의 가능성이다. 연극 종사자는 그 나름대로, 관객은 공간에서 행해진 재현을 적극적으로 서포트하면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함께 그 공간에 존재하는 것 즉 ‘공동현존’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브라운관과 스크린 나아가 이제는 핸드폰과 태블릿 액정을 거리에 두고는 우리는 함께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들과 함께 삶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칠게 숨 쉬는 성스러운 연극’을 만들기 위해서는 연극인과 관객 모두가 첫째로 변화에 대한 열망으로 가지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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